REVIEW · 음악·음반
부활의 슬픔을 이기는 기도와 추억이면, 상실을 견디는 두 가지 속도

노래방 번호
부활의 ‘슬픔을 이기는 기도’와 ‘추억이면’을 나란히 들으면, 슬픔을 견디는 마음에도 서로 다른 속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앞의 곡은 힘 있는 흐름 안에 아픈 말을 싣고, 뒤의 곡은 일상의 풍경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사람을 바라본다. 두 노래를 반드시 하나의 이야기나 정해진 시간순으로 묶을 필요는 없다. 움직이면서 감당하는 마음과 잠시 머물며 되짚는 마음은 같은 사람에게도 함께 있을 수 있다. 비교의 출발점은 어느 쪽이 더 성숙한 이별인가가 아니라, 각 곡이 상실을 어떤 모습으로 들려주는가에 있다.
슬픔 앞에서 몸을 움직이는 노래
‘슬픔을 이기는 기도’의 강한 리듬은 제목을 이미 달성한 승리로 바꾸지 않는다. 소리가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사랑했던 사람을 기다리던 기억과 고통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활기는 슬픔의 반대라기보다 그것을 품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들린다. 기도라는 말 역시 무언가를 확실하게 이뤄냈다는 선언보다,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를 향해 마음을 보내는 행위에 가깝다. 소리의 추진력과 가사에 남은 상처를 함께 들으면, 제목의 ‘이긴다’는 말에도 간절함이 묻어난다.
리듬이 강할수록 슬픈 말이 덜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멈춰 서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계속 움직이면서 붙들고 있는 듯한 긴장이 생긴다. 노래를 밝고 어두운 분위기로만 나누면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다. ‘슬픔을 이기는 기도’에서는 힘 있는 소리와 아픈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간단히 정렬되지 않는다. 그 어긋남이 노래를 한 번의 감정 폭발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견디려는 의지와 아직 견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들리기 때문이다.
일상에 스며드는 오래된 얼굴
‘추억이면’에서는 음악과 비, 창밖의 모습 같은 일상의 단서가 지난 사람을 가까이 불러온다. 화자가 기억을 떠올리기로 결심해서만 과거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흘러나오는 소리나 눈앞의 풍경이 먼저 마음을 건드리고, 사라졌다고 생각한 장면이 현재에 겹친다. 추억은 별도로 꺼내보는 보관함보다 생활 속에 남은 반응으로 읽힌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예전과 같은 날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익숙함은 편안함과 함께 빈자리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곡의 그리움은 상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일로 해결되지 않는다.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음악과 풍경을 통해 느끼는 순간 자체가 중심에 있다. 기억이 가까워졌다고 관계까지 복원된 것은 아니며, 그 차이가 노래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추억을 과거에 갇힌 마음으로만 읽을 필요도 없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현재의 감각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들을 수 있다. 비와 음악은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남아, 달라진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비춰준다.
두 곡 사이에서 달라지는 기억의 자리
두 곡을 듣고 다시 ‘슬픔을 이기는 기도’의 움직임으로 돌아가면, 견딘다는 말의 뜻도 조금 넓어진다. 힘을 내어 앞으로 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익숙한 노래 앞에서 잠시 멈추는 날도 있다. ‘추억이면’의 회상이 앞선 노래의 정답이나 완성된 치유가 될 필요는 없다. 부활의 두 곡은 상실을 한 방향의 성장 이야기로 묶기보다,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여러 태도를 나란히 놓게 한다. 남는 것은 슬픔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아니라, 서로 다른 소리 안에서 그 마음을 견뎌내는 사람의 모습이다.